상화의 시

지반정경(池畔靜景)

- 파계사(把溪寺) 용소(龍沼)에서

능수버들의 거듭 포개인 잎 사이에서
해는 주등색(朱橙色)의 따사로운 웃음을 던지고
깜푸르게 몸 꼴 꾸민, 저편에선
남 모르게 하는 바람의 군소리- 가만히 오다.

나는 아무 빛깔에도 없는 욕망(慾望)과 기원(祈願)으로
어디인지도 모르는 생각의 바다 속에다
원무(圓舞) 추는 혼령(魂靈)을 뜻대로 보내며
여름 우수(憂愁)에 잠긴 풀 사잇길을 오만(傲慢)스럽게 밟고 간다.

우거진 나무 밑에 넋빠진 네 몸은
속마음 깊게- 고요롭게- 미끄러우며
생각에 겨운 눈물과 같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빈 꿈을 얽매더라.

물위로 죽은 듯 엎디어 있는
끝도 없이 열푸른 하늘의 영원성(永遠性)품은 빛이
그리는 애인(愛人)을 뜻밖에 만난 미친 마음으로
내 가슴에 나도 몰래 숨었던 나라와 어우러지다.

나의 넋은 바람결의 구름보다도 연약(軟弱)하여라
잠자리와 제비 뒤를 따라, 가볍게 돌며
별나라로 오르다- 갑자기 흙 속으로 기어들고
다시는 해묵은 낙엽(落葉)과 고목(古木)의 거미줄과도 헤매이노라.

저문 저녁에, 쫓겨난 쇠북 소리 하늘 너머로 사라지고 이 날의 마지막
놀이로 어린 고기들 물놀이 칠 때
내 머리 속에서 단잠 깬 기억(記憶)은 새로이 이곳 온 까닭을 생각하노라.

이곳이 세상 같고, 내 한 몸이 모든 사람 같기도 하다!
아 너그럽게도 숨막히는 그윽함일러라 고요로운 설움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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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해석

1924년 『개벽』12월호(통권 54호)에 발표된 이 시편은「벙어리노래」라는 연작 4편 중 한 작품이다. 이상화 시는 초기 『백조』에 발표된 작품에서 보였던 감상적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1925년부터 저항적 민족주의 경향을 드러내는데, 이 작품은 초기 시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 것 중의 하나다. 부제에서 보는 것처럼 대구의 대표적인 사찰인 ‘팔공산 파계사’라는 구체적인 지명이 나오고 있어 대구 향토 시인의 작품으로서 친근감을 준다.
‘지반(池畔)’은 ‘못 가’를 뜻하는 말이다. ‘용소(龍沼)’는 폭포 아래 생긴 못을 일컫는 보통명사다. 그러니 이 시편은 화자가 팔공산 파계사 부근 못 가에서 못의 수면이나 주위의 고요한 정경을 시적 대상으로 한 작품이다. 전체 6연으로 구성되었고 각 연은 모두 4행으로 되어 있다. 긴 자유시의 분방함과 4행을 1연으로 구성한 정형시의 규격성이 공존한다. 거의 띄어쓰기가 되지 않은 표기법, 관념적인 한자어의 잦은 사용, 몽상적이고 영탄적인 어조 등은 주제 층위에서 시적 의미를 캐는 것보다는 분위기나 이미지 층위에서 작품을 읽도록 한다.
못 수면에는 상반된 두 가지가 비친다. 하나는 밝은 웃음을 머금은 영원한 하늘이다. 하늘(해, 한울)은 내 가슴에 몰래 숨어 자리 잡은 애인이고 나라인데, 그것은 시인이 추구하는 이상향이다. 화자는 그 이상향을 동경하며 잠자리와 제비처럼 하늘을 비상하는 꿈에 젖는다. 또 다른 하나는 땅에 서 있는 현실적인 나다. 하늘로 날아오르던 나는 추락하여 거미줄이 얽혀 있는 고목의 숲을 방황하는, 바람결의 구름보다 더 연약한 영혼을 가진 슬픈 존재다.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를 어찌 감당하느냐가 문제다. 잠에서 깨어나듯이 이상과 현실의 거리를 정면으로 인식하는 것이 해결 방법이다. 나와 세상이 하나고 내 한 몸이 모든 사람의 몸과 같다는 진리가 그 열쇠다. 그것은 주객의 통합이고,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지우는 일이다. 숨 막히는 진리의 깨달음이다. 시인이 ‘파계사’에 간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해설 : 신재기(문학평론가, 경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