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화의 시

폭풍우(暴風雨)를 기다리는 마음

오랜 오랜 옛적부터
아, 몇 백(百)년 몇 천(千)년 옛적부터
호미와 가래에게 등살을 벗기우고
감자와 기장에게 속 기름을 빼앗기인
산촌(山村)의 뼈만 남은 땅바닥 위에서
아직도 사람의 수확(收穫)을 바라고 있다.

게으름을 빚어내는 이 늦은 봄날
「나는 이렇게도 시달렸노라……」
돌멩이를 내보이는 논과 밭-
거기에서 조으는 듯 호미질하는
농사짓는 사람의 목숨을 나는 본다.

마음도 입도 없는 흙인 줄 알면서
얼마라도 더 달라고 정성껏 뒤지는
그들의 가슴엔 저주를 받을
숙명(宿命)이 주는 자족(自足)이 아직도 있다.
자족(自足)이 시킨 굴종(屈從)이 아직도 있다.

하늘에도 게으른 흰구름이 돌고
땅에서도 고달픈 침묵(沈黙)이 깔아진
오- 이런 날 이런 때에는
이 땅과 내 마음의 우울(憂鬱)을 부술
동해(東海)에서 폭풍우(暴風雨)나 쏟아져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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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해석

이상화 선생의 시,「폭풍우(暴風雨)를 기다리는 마음」을 읽으면 문득 우리 민족에게 ‘들(땅)’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가지게 된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농경사회였다. 농경사회에서 ‘들’은 생존의 수단이다. 농경사회의 주체는 농민이지만 현실은 농사를 통해 겨우 목숨을 부지할 뿐이었다. 그것이 농경사회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부의 축적보다 생존을 위해 ‘들’을 혹사한다.

이 시에서 나타나는 산촌의 땅은 ‘호미와 가래에게 등살을 벗기우고’ 있다. 호미와 가래의 주체는 두 말할 것 없이 인간이다. 인간의 욕심으로 땅은 혹사당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위하여 땅 속에 품고 있는 최소한의 기름도 ‘감자와 기장’에게 빼앗기고 결국 ‘뼈만 남은 땅바닥’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황폐한 산촌의 땅에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수확을 바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황폐한 땅에 봄이 되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호미질을 한다. 그러면 땅은 기름진 흙을 내보이는 것이 아니라 돌멩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땅을 포기하지 못하고 ‘정성껏 뒤지’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던 것이 농민들의 현실이었다. 결국 땅은 농민에게 ‘자족’을 강요하고 그 ‘자족’은 ‘굴종’을 강요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고 있다.

이렇게 황폐한 땅조차 ‘빼앗긴 들’이 된 우리의 조국 현실이 아니었던가. 그 ‘들’에 필요한 것은 ‘단비’이다. 그런데 ‘하늘(당시의 국제적 상황)’에는 비구름은 보이지 않고 ‘게으른 흰구름’만 떠돌고 일제의 강압은 우리에게 ‘침묵(굴종)’만을 강요하고 있다. 시인은 이런 조국의 현실 앞에서 민족의식을 일깨워 조국의 현실을 타파할 ‘폭풍우(민족의식, 독립운동)’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해설 : 구석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