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화의 시

역천(逆天)

이때야말로 이 나라의 보배로운 가을철이다.
더구나 그림과도 같고 꿈과도 같은 좋은 밤이다.
초가을 열나흘 밤 열푸른 유리로 천장을 한 밤
거기서 달은 마중 왔다 얼굴을 쳐들고 별은 기다린다 눈짓을 한다.
그리고 실낱같은 바람은 길을 끄으려 바라노라 이따금 성화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오늘밤에 좋아라 가고프지가 않다.
아니다 나는 오늘밤에 좋아라 보고프지도 않다.

이런 때 이런 밤 이 나라까지 복되게 보이는 저편 하늘을
햇살이 못 쪼이는 그 땅에 나서 가슴 밑바닥으로 못 웃어 본 나는 선뜻만 보아도
철모르는 나의 마음 홀아비 자식 아비를 따르듯 불 본 나비가 되어
꾀이는 얼굴과 같은 달에게로 웃는 이빨 같은 별에게로
앞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곤두치듯 줄달음질을 쳐서 가더니.

그리하여 지금 내가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이 짓을 하는지
그것조차 잊고서도 낮이나 밤이나 노닐 것이 두려웁다.

걸림 없이 사는 듯하면서도 걸림뿐인 사람의 세상-
아름다운 때가 오면 아름다운 그때와 어울려 한 뭉텅이가 못 되어지는 이 살이-
꿈과도 같고 그림과도 같고 어린이 마음 위와 같은 나라가 있어
아무리 불러도 멋대로 못 가고 생각조차 못하게 지천을 떠는 이 설움
벙어리 같은 이 아픈 설움이 칡넝쿨같이 몇 날 몇 해나 얽히어 틀어진다.

보아라 오늘밤에 하늘이 사람 배반하는 줄 알았다
아니다 오늘밤에 사람이 하늘 배반하는 줄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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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해석

역천(逆天)은 1935년 4월『시원(詩苑)』2호에 발표한 작품이다. 왜 그는 하늘을 거슬러야할 만큼, 아니 하늘과 땅을 뒤엎어버리고 싶을 만큼 스스로 혼돈을 자초하고 싶었을까?
“시(詩)는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받은 자들의 양식이다.”라는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s)의 말처럼 1920년대 나라를 잃어버린 한 저항적 시인이자 지식인이었던 상화의 시는 한 편 한 편 모두 민족을 상실한 아픈 시대사를 고뇌했던 서러운 주문(呪文)이자 탄원(歎願)이며, 광기(狂氣)이기도 했다. 그가 살았던 일제의 시대적 상황은 내선일체 정책이 강화되던 무렵이었다. 이 시작품이 발표되기 전후해서 그의 개인의 삶 또한 매우 복잡다단했던 시기이다. 「역천」을 통해 시대적으로는 일제 치하에 대한 저항과 갈등으로 또 개인 적으로는 인간적인 사랑의 좌절과 마주하게 된다. 이와 같은 역사 속의 격동 속에서 그가 꿈꾸던 이상과 현실은 전복되고 산산이 부서진 그 파편들이 포개어진 현실을 시의 언어로 직조한 작품이다.
「역천」의 시적 구조는 하늘과 땅이 대립구조를 반영하고 있으며, 또 태양과 달 그리고 별이 이상의 세계인 하늘에 무늬를 이루고 있다. 시인이 딛고 서 있는 이곳의 땅은 이미 나의 땅이 아닌 식민의 땅이니까 하는 수없이 하늘을 동경할 수밖에 없고 그 하늘조차 어둠이 가득 차있는 현실이니 달이나 별을 좇을 수밖에 없다.
그 별이나 달이 그리운 조국의 광복이 되기도 하고 또는 이별한 사랑일 수도 있다. 그러나 늘 별이나 달은 저 멀리 있다. 그것은「역천」의 시적 구조에서 나타나는 상황과 의식의 전복(顚覆)이다. 이 구조적 갈등은 의도된 시적 계획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삻 그 자체가 끊임없이 이상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적 현실에 기인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현실 속에서 그가 꿈꾸던 그 이상은 늘 비켜서 있기만 하였다. 그만큼 그의 삶은 갈등의 연속이었으며 시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갈등을 거짓 없이 토로한다. 위장된 가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 점을 상화가 극복하지 못한 문학적 한계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전혀 그와는 상반된다.

해설 : 이상규(시인, 국립국어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