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화의 시

나는 해를 먹다

구름은 차림옷에 놓기 알맞아 보이고
하늘은 바다같이 깊다라- ㄴ하다.

한낮 뙤약볕이 쬐는 지도 모르고
온몸이 아니 넋조차 깨운-아찔하여지도록
뼈 저리는 좋은 맛에 자스러지기는
보기 좋게 잘도 자란 과수원(果樹園)의 목거지다.

배추속처럼 핏기 없는 얼굴에도
푸른빛이 비치어 생기를 띠고
더구나 가슴에는 깨끗한 가을 입김을 안은 채
능금을 바수노라 해를 지우나니.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발을 뻗기도 하면서
무성한 나뭇잎 속에 숨어 수줍어하는
탐스럽게도 잘도 익은 과일을 찾아
위태로운 이 짓에 가슴을 조이는 이때의 마음 저 하늘같이 맑기도 하다.

머리카락 같은 실바람이 아무리 나부껴도
메밀꽃밭에 춤추던 벌들이 아무리 울어도
지난날 예쁜 이를 그리어 살며시 눈물지는,
그런 생각은 꿈밖에 꿈으로도 보이지 안는다.

남의 과일밭에 몰래 들어가
험상스런 얼굴과 억센 주먹을 두려워하면서.
하나 둘 몰래 훔치던 어릴 적 철없던 마음이 다시 살아나자.
그립고 우습고 죄 없던 그 기쁨이 오늘에도 있다.

부드럽게 쌓여 있는 이랑의 흙은
솥뚜껑을 열고 밥 김을 맡는 듯 구수도 하고
나무에 달린 과일-푸른 그릇에 담긴 깍두기 같이
입안에 맑은 침을 자아내나니.

첫가을! 琴湖江 굽이쳐 흐르고
벼이삭 배부르게 늘어져 섰는
이 벌판 한가운데 주저앉아서
두 볼이 비자웁게 해 같은 능금을 나는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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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해석

1935년 『조광』 2호에 실린 시. 금호강이 굽이치고 벼가 익는 들판에서 ‘두 볼이 비자웁게 해같은 능금을 먹는’ 광경을 그려보인다. 8연 30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5연의 마음의 심난함을 떨치는 모습을 제외하고는 전편에 가을 기운 속에서 과일을 따고 먹는 싱그러움이 넘치고 있다. 능금을 먹는 소년같은 티 없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흰 구름이 떠 있는 하늘이 푸르게 펼쳐져 있는 들판은 햇빛이 싱그럽다. 해는 모든 생명의 중심 기운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이 능금에 비유되고, 능금을 따고 능금을 먹는 그 ‘넋 조차 깨운(’개운한‘의 해석을 따르고 싶다)-아찔’한 상태가 해를 먹는 것으로 비유됨으로써 더욱 극적으로 생명감이 고조된다.


마치 이상화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온몸에 풋내를 띠고’ 들판을 걸어가는, 봄 신령이 지핀 듯한 모습에서 드러나던 생기와 비슷한 느낌이다. 다만 계절이 봄에서 가을로 바뀌고 꽃과 풀이 능금이라는 과일로 바뀌었으며, 과일을 먹는 미각의 느낌이 두드러지는 차이가 있다. 무성한 나뭇잎 속에 숨은 과일을 따는 ‘위태로운 짓’은 가슴을 조이게 하지만, 그것은 과일서리를 하던 어릴 적의 ‘우습고 죄없던 그 기쁨’의 만끽에 다름 아니다. 저 천진난만한 모습! 능금은 한 때 대구를 상징하는 과일이었다. 대구가 능금의 도시라 불리기도 했다. 지금은 기후의 변화로 한반도의 중부지역으로 그 재배권역이 올라가버렸지만, 당시만 해도 능금 과수원이 대구주변에 많았다. 그런 금호강 유역의 과수원 풍경을 통해 대구라는 지역성을 강조하면서 동심의 천진스런 즐거움을 드러냄으로써, 민족의 생기와 꿈을 하늘같이 맑게, 한 폭의 그림처럼 비춰내보이고 있다. 이를 통해 비록 ‘빼앗긴 땅’이어도 그 땅에 오는 봄은 엄연히 우리 것이라 노래했듯, 결코 남의 것이 될 수 없는 우리 땅 우리 들판의 아름다움과 생기를 ‘솥뚜껑을 열고 밥 김을 맡는 듯 구수하게’ 그리고 ‘푸른 그릇에 담긴 깍두기’같이, 또는 능금의 ‘뼈저리는 좋은 맛’의 미각으로 아름답게 부각시킨다.

해설 : 이하석
약력/ 1948년 경북 고령 출생. 1971년 『현대시학』지 추천으로 등단. 시집 『투명한 속』『김씨의 옆얼굴』『우리 낯선 사람들』『측백나무 울타리』『것들』등.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대구시문화상등 수상.